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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도 이야기

소통의 중심 '뉴스스토리' 2011. 2. 11. 21:35

2011년 02월 11일 (금) 00:17:11 김억수 scagenda@naver.com

   
 

이번부터는 유부도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보고자 한다.

서천연안 인근에는 십여 개의 섬이 있는데 유부도에만 사람이 거주한다. 현재 30여 가구가 거주를 하고 있다. 장항에서는 배를 타고 20여분 걸리는데 정기적으로 가는 배는 없다. 그래서 들어가려면 군산으로 가서 마을 분들의 배를 타고 들어간다.

줄 곳 유부도를 많이 다녔는데 제작년부터 유부도 주민들을 대상으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면서 어려운 점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의 모습들에 대해 인터뷰와 모니터링을 하면서 보고서를 매년 만들고 있다. 2009년에는 군수를 비롯한 행정공무원과 단체, 주민들이 교회에 모여 유부도에 대한 토론과 고민을 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는 유부도가 지역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아주 중요한 생태적 지위에 있고 유부도 주민뿐만 아니라 서천주민, 나아가서는 국가적으로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속가능한 보전과 이용을 위해 이해당사자들이 머리를 맞댈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부도에 대한 생태환경과 삶을 지속적으로 살펴보고 섬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 지역사회단체가 제시하는 것, 서천군이 정책적으로 추진하려고 하는 것들이 한데 모여지고 토론이 되어야 비로소 유부도의 바람직한 보전과 섬 주민들의 삶을 질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유부도 사람들이 섬에 들어와서 살게 된 이유를 시기와 문화를 조명해 본다.

유부도는 서천군 장항읍 송림리에 속한 섬이다. 장항에서 5㎞ 정도 떨어져 있지만 실제는 군산과 불과 1㎞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주민들은 군산과 장항을 생활권으로 하고 있다. 면적은 0.77㎢이며 갯벌을 포함하면 약 200만평에 가까운 섬이다. 현재 인구는 33가구에 60여명이 생활하고 있다. 유부도는 해발 40m 정도의 오이형태의 산이 동쪽에 자리하고 있고 그 서쪽으로 긴 사구가 발달되어 있다.

유부도에는 유부도 조개무지, 유부도 전통 떼집, 유부도 인구 유입의 원인이 되었던 유부도 염전이 남아 있다. 유부도에 입도하게 된 마을 주민 조사에서는 크게 1960년 이전에 입도한 시대와 그 이후 시대로 나눌 수 있었다. 1960년 이전 유부도에 입도한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어민으로 입도하였다. 1960년 이후 입도한 사람들은 염전, 김, 수심원과 관련하여 입도하였다. 
 

   
▲ 항공사진으로 본 유부도

인구

유부도에는 현재 반장 조현상씨를 비롯하여 37세대 60여명이 살고 있다. 1949년에 입도한 김봉렴 할머니에 의하면 군산에서 범선을 타고 들어 왔는데 정기남씨 가족만 살고 있었다고 한다. 산 서사면에 빈집들이 있어 한 집을 택해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1965년에 입도한 조현상씨에 의하면 염전을 만들기 위하여 입도를 하였는데 그때 7가구 10여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7가구는 정재봉, 박기수, 배노수, 신봉남, 지종찬, 김영렬, 신상길 씨댁이다. 1965년도에 조남두, 조남호, 김관치, 서석형씨가 염전을 만들면서 노동인구 유입되어 35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80년대 김 양식의 활성화와 수심원의 운영으로 인구가 늘었다가 일자리가 사라지자 급격하게 인구가 감소하였다.

교육

유부도의 유일한 공공기관은 송림초등학교 유부도 분교이다.

   
▲ 송림초등학교 유부도 분교

송림초등학교에서 파견된 선생님 2분이 5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2011년 현재는 학생수가 줄었다). 유부도 분교는 1973년 4월 1일 개교하여 현재까지 꾸준히 유부도 학생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교사 1동과 최근에 새로 지은 선생님 숙소 1동, 그리고 한때 인구가 많은 때 유부도 파출소가 있던 폐건물 1동이 있다. 운동장에는 유부도 특유의 식물이 자라고 있어 자연스런 잔디 구장이다. 주변에는 해당화가 담장을 이루고 있다. 김 양식이 활성화되었을 때는 단오를 즈음해 유부도의 날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유부도 사람들의 교육을 위하여 노력한 흔적이 있다. 1970년대 군산에 사는 강경식씨가 건너와 야문이네, 고학순씨네를 전전하며 밤에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야학시대이다. 그 후 수심원이 생기면서 수심원에서 수업을 하다 학교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수심원 원장 최판씨가 교육기관에 건의를 하여 유부도 분교가 마련되었다고 한다. 유부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선생님은 석순태, 양을준, 김시연 교사였다. 이들은 마을 주민들과 대화를 많이 하고 주민들의 애로 사항을 해결해주는 해결사 역할을 하였다.

   
▲ 유부도 분교 아이들 철새교육
바닷바람에 견뎌낸 흔적들이 역력한 학교 건물만큼이나 학생들의 꿈도 이곳에서 자랐을 것이다. 현재 재학 중인 영철이는 바다와 철새가 좋다고 하였다. 조사자의 바람이 있다면 유부도 분교에 근무하는 선생님께서 직접 유부도의 환경과 철새 그리고 주민들을 조사 연구하여 유부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교육이 이루어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종교

유부도에는 갈릴리 교회와 소망교회 2개가 있다. 갈릴리 교회는 1970년 한 전도사에 의하여 설립되었으며 소망교회는 주민 박창구씨의 딸 박경숙씨가 사역하고 있다. 갈릴리 교회에는 군산과 장항을 오고가는 배를 구입하여 운영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교회 신자이다. 특별히 유부도에서 행해지는 종교 활동은 조사할 수 없었다. 단지 교회가 들어오기 전에는 조앙신이나 뱃고사 정도의 의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통

유부도에서 장항이나 군산으로 나오거나 들어가려면 배를 이용하여야 한다. 1949년쯤 군산에서 유부도를 오고가던 배는 구명호씨가 범선을 가지고 썰물에 유부도에 왔다가 민물에 군산으로 나갔다. 그 배를 이용하여 생필품을 구입하고 군산을 오고가고 했다. 유부도에 오고가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고 구명호씨의 사정에 의하여 오고갔다. 구명호씨 덕분에 당시 군산으로 나갈 수 있어서 늘 고맙게 생각했다. 그 후 손희철씨가 돛단배(風船)를 운영하여 군산을 오고갈 수 있었다. 배삯(船費)은 어장하는 사람들이 잡은 생선을 주었다. 당시 사람들이 잡았던 생선은 중하, 꽃게, 대하, 숭어, 전어 등이었다. 중하는 주로 뗏마(木船)를 이용하여 잡았다. 신상길씨가 운영하던 유복호라는 기계배가 운영되었다.

   
▲ 장항에서 출발해 유부도로 가는 선외기

1970년대부터 1985년도까지 유부도에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자 “새마을 13호”라는 배가 운행되었다. 군산항을 출발하여 장항도선장을 경유하여 유부도에 왔다. 그리고 개야도를 돌아서 다시 유부도, 장항, 군산을 왕복 운행하였다. 한때는 수심원에서도 수심원 가족들을 운송하기 위하여 수심원 전용 “수심호”가 있었다. 당시 환자 가족, 직원, 그리고 생필품을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하였다.

선착장은 본래 “줄려고랑”이라고 하여 섬의 북사면에 있었다. 선착장까지 가려면 주민들의 불편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을에서 북사면 갯벌을 따라 물길이 있는 곳까지 내려가야 했다. 그리하여 마을과 가까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두 번째 부두라고 할 수 있다. 도류제 공사이후 선착장의 기능이 보완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가구당 배를 마련하여 운항하고 있다. 없는 사람들은 배를 소유한 사람들의 일정에 맞춰 군산과 장항을 오고간다. 유부도에 들어가려면 배를 가진 사람에게 사전에 연락을 하여야한다.

전기, 물, 쌀

얼마 전까지 유부도에는 3가지가 없었다. 술집, 물, 전기가 없는 3무 마을이었다. 지나친 음주가 마을 공동체를 붕괴시킨다고 하여 마을회의에서 술을 개인적으로 육지에 나가 사다먹을 수 는 있어도 유부도 내

   
▲ 유부도 발전소
부에서 팔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어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그래서 술집이 없다.

다음으로는 유부도에 전기, 물, 쌀이 없어 불편하였다. 최근에 발전기를 설치하여 전기를 자가 발전하여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발전기를 돌려야 하기 때문에 기름을 장항에서 늘 가져와야 한다. 기름을 장항에서 가져오면 발전기가 있는 곳까지 운반하는 것은 많은 주민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그러나 선착장에서 발전실까지 운반하는 일은 매우 불편하게 하고 있다. 추운 날 기름을 운반하는 일은 너무나 가혹한 작업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서로 봉사를 하고 있다.
물은 2009년 상수도를 설치하여 이만저만 편리한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는 장항에서 배로 운반하여 갖다 먹었다. 지금은 자체 상수원을 마련하여 물을 공급하고 있어 너무나 편리한 생활을 하고 있다.

유부도의 농작물은 채소가 될 뿐이다. 고추, 고구마, 감자, 배추, 시금치 등 채소가 생산될 뿐 벼농사는 짓지 못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주식은 쌀과 보리는 대개 군산이나 장항에서 구입하였다. 어장을 통하여 잡힌 물고기를 내다팔아 주식인 쌀이나 보리를 얻을 수 있었다.

유부도의 가옥 “떼집”

유부도 떼집에는 지금 김정원씨가 살고 있는 집이다. 떼집은 유부도의 가옥을 잘 이해 할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1973년에 입도한 김정원씨는 어장을 경영하였는데 살 집이 없어 직접 전통 방식으로 떼집을

   
▲ 김정원씨가 1974년 입도해 지은 떼집 전경
지었다는 것이다. 유부도에 총 40여 가옥이 남아 있지만 유일하게 김정원씨 떼집이 남아 있다. 이 집은 방 2칸 부엌 1칸으로 3칸의 초가이다.

지금은 스레이트 지붕과 시멘트로 벽을 발랐지만 그 구조는 그대로 남아 있다. 떼집은 벽돌을 만들 수 없었던 유부도에서 떼를 벽돌처럼 떠서 싸 올린 벽에 지붕을 올린 집이다. 유부도의 환경과 생태적인 삶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앞으로 보존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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